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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눈물의 의미(펌)

Tony the 명품 2008. 7. 10. 06:57
법정에서 삼성 얘기 중 울컥 … 치열했던 기업가의 20년 회한
철인과도 같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지난 7월 1일 재판 과정에서 눈물을 보였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그가 흘린 눈물은 남다르다. 개인적 회한을 넘어 기업가로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예견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만감이 교차했을 그의 내면을 짚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변 상황과 그의 기업가 인생을 돌아볼 때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눈은 큰 편이다. 껌뻑껌뻑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은 겁도 많고 눈물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눈물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선친인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도 마찬가지다. 이병철 창업주 역시 공식석상에서 운 적은 없었다.

1980년 신군부에 TBC를 빼앗겼을 때도 이병철 회장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가슴에 갈무리한 분노와 절규가 간장을 도려내는 듯했을 터이지만 말이다.

TBC를 내놓기로 각서를 쓰고 나서 여의도에 새로 지은 스튜디오로 갔을 때 탤런트들이 나와서 통곡했지만 이병철 회장은 입술을 깨문 채 허공을 응시했을 뿐이다.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아니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영자로 늘 공적 영역에서 살아온 탓에 극도의 절제가 몸에 밴 것인가. 이건희 전 회장에게 눈물은 절대 흘려서는 안 될 금기나 되는 것처럼 일반인의 눈에 띈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눈물을 보였다. 내면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기에, 육체적 흔들림을 보였던 것일까.

지난 7월 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민병훈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삼성재판’에는 이 전 회장이 피고인으로, 아들인 이재용 전무가 증인으로 함께 참석했다. 부자(父子)가 함께 재판정에 서는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의 눈물은 아들 이야기에서 나오지 않았다. 재판정에 들어서기 전 “재용씨에게 도의적인 책임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들은 책임이 없다”며 확신에 찬 말로 답했다. 법정에서도 냉정했다.

그는 “아들을 후계자로 생각해 봤다”고 하면서도 “재용이가 후계자가 되려면 본인의 능력이 닿아야 한다. 그 능력이 후계자로 적당치 않으면 절대로 이어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경영자로서의 능력이 없으면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 전 회장이 갖고 있는 경영관과 후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지나칠 정도로 침착한 그의 마음을 흔든 것은 의외의 질문이었다. 재판부는 “삼성 계열사 가운데 특별히 중요한 회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전 회장은 자신 있게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삼성전자 제품 가운데 11개가 세계 1위”라며 “세계 1위는 정말 어려운 일이고, 그런 회사를 또 만들려면 10년, 20년이 걸려도 힘들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복받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재판장은 “힘들면 휴정했다가 다시 하자”고 했지만 이 전 회장은 “계속하자”고 했다. 잠깐 동안 일어난 일이었지만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의 1위 제품을 말하면서 눈물이 고였다. 회사 얘기가 나오자 만감이 교차한 듯했다. 자식에 대해 말할 때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의연했던 그가 왜 회사 이야기에서 흔들렸을까?

방청석에서 재판을 바라본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삼성전자 이야기를 하면서 울먹이는 것을 보고 나도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샐러리맨과 기업가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기업가가 갖는 자신이 일군 기업에 대한 애착은 어쩌면 아들을 향한 애정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오너는 “자기 기업을 갖지 않고, 혼을 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라고 했다.

그는 “자식은 물론, 자신도 기업이 존재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교육 받은 사람들에게 기업은 자식 이상의 애정과 혼이 담긴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체를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등 삼성 위해 불태운 魂

김주한 정신과 전문의는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이 복받친 것은 회사를 단순히 객관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보는 심리가 담겨 있다”고 했다. 기업을 자신과 분리되지 않을 정도로 애정이나 감정이 결합된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24시간 회사 생각만 해 왔던 회장을 경영권에서 손 떼게 하는 것은 어쩌면 자식을 빼앗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실제 이 전 회장의 생활은 회사일과 개인사가 구분되지 않는다.

20년 전 한 인터뷰에서 이 전 회장은 “20년 동안 가족끼리 외식한 게 두세 번 정도밖에 안 된다. 집에 가서 잠옷 갈아입고 방에 한번 앉아 버리면 거의 출입을 안 한다. 애들도 2~3일에 한 번 와서 ‘아빠’ 소리 한 번 하고 한 5분 정도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다”고 털어놨다.

삼성그룹의 고위 관계자도 “그런 생활 패턴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의 구 한남동 자택 집무실. 이 전 회장은 이곳에 들어가면 7~8시간씩 나오지 않느다고 했다. 책상 주위에 쌓인 책, 잡지, 앞에 놓인 두 대의 TV와 세계 각 지역 시간을 표시하는 5개의 벽시계가 이채롭다.


세상에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다. 이 전 회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변화와 도전에 맞서야 하는 기업가로서의 아버지는 가족과 행복을 나누기 어렵다.

20년 동안 그렇게 살면서 가슴은 더욱 냉정해질 수밖에 없고, 경영에 대한 감각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공적, 사적으로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잠옷 입고 방에 들어가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책 보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다. 물론 모두 사업과 관계된 것들이다. 삼성 회장이 되기 전 그는 진돗개를 키우는 일과 아마추어 레슬링협회장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취미라고 할 수는 없지만 회사 일 외에 과외 일이 있었던 셈이다. 또 탁구협회도 도와줬고, 골프에도 상당한 취미가 있었다. 골프는 한때 71타까지 쳤다고 한다. 탁구도 여자 국가 대표 선수와 비슷한 실력이었다고 한다. 프로 수준이다.

하지만 회장이 된 이후 사색 이외에 이런 취미는 한쪽으로 밀린다. 실제 이 전 회장은 해외 출장을 제외하면 거의 승지원이나 한남동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 내내 주로 혼자 지낸다. 대한민국 최대 기업 총수답지 않은 고독하고 은둔과 같은 생활이다.

24시간 토론하고, 생각하는 경우는 허다하고 최장 48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은 적도 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비정상에 가까운 몰입이다.

이런 집중력 덕에 그는 세계적인 수준의 삼성 CEO를 모아놓고 회의할 때 주도권을 갖고 이끌었다. 사업부마다 문제점을 CEO와 직접 토의했다. 지난해 삼성 비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 유출된 이 전 회장의 지시사항에서도 그의 정교함을 읽을 수 있다.

2003년 회의록에서 이 전 회장은 ‘DVD플레이어의 열 발생과 오작동’ ‘DVD플레이어에 슬로모션이나 정지화면이 안 되는가’ 같은 세부적인 문제에서 ‘반도체 기술 발전에 따른 기술 인력 스카우트 문제’까지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지시한 것을 볼 수 있다.

매일 7~8시간씩 혼자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 전문가를 능가하는 전문지식을 갖게 됐고, 이는 회의 때 그대로 전달되는 셈이다. 이처럼 이 전 회장에게 ‘회사일’은 생활이고 인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 회장은 87년에 삼성 회장직에 올랐다. 당시 삼성그룹은 국내에서는 알아주는 최고 기업이었으나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외국에 내놓을 변변한 브랜드 하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전 회장 스스로 말했듯 11개 제품이 세계 1위에 올라섰고, 전 계열사가 한국 최고는 물론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일본 전자업계 강자들이 삼성전자에 무릎을 꿇었다. 세계를 석권하던 소니, 도시바, 샤프를 추월한 것이다. 특히 2000년에는 삼성전자가 소니의 시가총액을 추월했고, 2005년에는 브랜드 가치마저 앞질렀다.

세계 최고였던 소니 TV는 이제 매출액이나 판매대수 등에서 삼성보다 한 수 아래다. 소형기기의 최강자라는 일본 기업도 글로벌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휴대전화 분야에서 삼성전자는 노키아의 뒤를 이어 세계 2위 업체로 올라섰다.

비단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빌딩인 버즈 두바이는 삼성물산(건설부문)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삼성중공업 역시 세계 최고가인 LNG선을 수주해 만들고 있다.

삼성그룹의 놀라운 변화는 숫자로도 읽을 수 있다. 그가 회장에 취임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1988년 삼성그룹 총 매출액은 20조1000억원에 불과했다. 당시 순이익은 4500억원이었고, 수출액은 9조원이었다.

하지만 2006년 그룹 매출은 152조원, 순이익은 14조2000억원, 수출액은 63조원으로 늘어났다. 매출은 7.5배 늘어났고, 이익은 20배 늘었다. 수출 역시 7배나 뛰었다.

여기에 브랜드 가치는 169억 달러(2007년 기준)로 세계 20위권에 올라있다. 불과 2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난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 기적은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이 전 회장 혼자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발전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건희 20년의 개혁 플랜이 이런 열매를 맺게 한 것이다.

실제 미국의 비즈니스위크, 포춘, 타임과 일본의 다이아몬드, 이코노미스트 등 유수의 매체들은 삼성의 성공 비결을 분석하면서 하나같이 이 전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을 핵심 요인으로 언급했다.

강력한 리더십만큼 그동안 많은 어려움도 겪었다. 이 전 회장은 1995년 베이징 주재 특파원과 오찬 간담회에서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는 발언으로 어려움에 시달렸다. 또 대선자금 문제로 1995년 법정에도 출두했다.

▶93년 프랑크푸르트 회의 당시 직원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이 전 회장.


삼성이 갈 길 아직도 먼데…

회장 취임 초기에는 각종 루머에 시달렸고, 후반기에는 황제경영, 삼성공화국 논란에 휘말리면서 항상 한국 사회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이유로 그가 사회를 향해 던진 말, 예를 들어 ‘2만불 시대’ ‘디자인 경영’ ‘창조 경영’ 등은 모두 한국 사회와 경영계의 화두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한국 사회와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이 전 회장의 비중은 컸다.

이 전 회장은 이런 논란의 중심, 사회적인 중압감, 개인적인 불행 등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일류 삼성’ ‘1등 삼성’을 만드는 데 진력했다. 이 전 회장은 이런 사회적 논쟁에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서 어떤 반발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영자로서 무언가를 응시하며 사업에만 몰두했다.

사실 이 전 회장은 내성적이고 과묵한 성격이다. 그를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때로 오너들은 자기 과시적이고, 다변인 경우가 있지만 이 전 회장은 사석에서조차 말이 별로 없다.

오히려 공적인 자리,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 회의 같은 곳에서 모아뒀던 말을 한꺼번에 정리하지만 대체로 말이 적고 간단 명료하다.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씨는 96년 호암상을 받고 수상축하 만찬장에서 그를 만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회장은 과묵한 성품인 듯 시종 말이 없었다. 능란하고 세련돼 있지도 않았다. 웃는 모습은 스스러워하는 듯했고, 깊은 곳에 가라앉아서 세상을 응시하는 듯했다.” 세계적 주간지 뉴스위크가 그를 ‘은둔의 제왕’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간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전 회장은 이번 재판이 끝난 뒤 “‘증여 당시 운이 좋았다’는 말을 국민이 납득하겠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납득할 사람은 하는 것이고 안 할 분은 안 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 납득하고 안 하고는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지난 20년간 ‘납득할 사람’과 ‘납득 안 할 분들’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어 왔다. 반도체 투자가 그랬고, LCD 투자 역시 그랬다. 휴대전화의 ‘send’ 버튼의 위치를 바꾼 것도, 타워팰리스 같은 주상복합 아파트 역시 그의 고집의 산물이다.

그는 한 단계 앞으로 나갈 때마다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과 싸웠다. 그렇다고 시끄럽게 다투는 게 아니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내고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해 왔다.

그는 여러 차례 “회사의 직원도 회장 말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한탄했다. 예전엔 “회사일 안 해도 좋다. 일 안 하는 사람도 먹고살게는 해 주겠다. 그러니 제발 일하는 사람 뒷다리나 잡지 마라”고도 여러 차례 말했다.

회의록이나 그간 인터뷰를 보면 지난 20년간 자신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가 재판부의 평범한 질문에 눈시울을 붉힌 것도 지난 20년간 겪어온 이런 어려움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제일 중요한 기업인 삼성전자는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그가 보기엔 위태하다. 세계 최고 되기가, 또 그것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가 삼성전자의 11개 1등 품목을 언급하면서 울컥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이제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그의 남다른 눈에는 지금 상황이, 그리고 미래가 불안한 듯하다. 그의 눈물은 남들은 모르는 20년의 회한이기도 하지만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기도 하다.
이석호 기자 (luk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