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난 집 맛난 얘기]
서울 서교동 <하노이 바게트>
주인장 김나리(29) 대표는 호주의 명문 요리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를 나온 엘리트 셰프다. 졸업 후 귀국해 국내 유명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근무했다. 일터에서 여러 가지 고급 서양요리를 만들면서도 내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단 하나의 음식이 있었다. 유학시절 학교 앞 점포에서 팔던 반미 샌드위치였다. 어느 날 무심코 그 집에서 맛본 반미 샌드위치가 김 대표에겐 매우 강렬한 경험이었다. ‘귀국하면 꼭 반미 샌드위치 전문점을 차려보겠다’는 꿈을 키웠다. <하노이 바게트>는 바로 몇 달 전에 실현한 김씨의 꿈터이자 베트남 음식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어두웠던 베트남 역사의 산물이지만 친근한 음식
반미(Banh mi) 샌드위치는 베트남의 국민음식이다. ‘반미’는 베트남어로 빵을 뜻한다. 지팡이처럼 생긴 프랑스를 상징하는 빵, 바게트가 식민지 시절 베트남에 들어갔다. 이 바게트에 베트남인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식재료를 채워 만든 것이 반미 샌드위치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의 국민 중식이 된 짬뽕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탄생 배경과 현재의 위상이 서로 엇비슷하다.
프랑스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손을 댔다. 이때부터 프랑스 음식문화가 자연스럽게 베트남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전쟁과 식민정책은 문화의 이종교배가 왕성하게 자라나는 토양이다. 영화와 소설로 알려진 ‘인도차이나’에 보면 1930년대의 프랑스-베트남의 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종주국과 식민지, 반미 샌드위치도 이런 과거 역사의 산물이다.
과거 회상은 종주국 입장에서는 아련한 추억일 수 있지만 식민지 입장에서는 씁쓸한 기억이다. 그러나 반미 샌드위치만큼은 그 자체가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이 뿌리 박힌 문화이고 음식이 됐다. 베트남의 상점이나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베트남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친근한 음식이다. 마치 우리의 짬뽕처럼.
바삭한 바게트 속에 각종 채소와 포크, 치킨, 미트볼이...
안으로 들어서면 아담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 든다. 아오자이 차림의 베트남 여성이 그려진 그림과 반미 샌드위치를 파는 베트남 거리 풍경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에서 주인장 김씨가 샌드위치를 만드는 작업장 겸 매대가 손님을 맞는다.
<하노이 바게트>는 즉석 샌드위치여서 내용물의 신선도가 높다. 그러나 패스트푸드는 아니다. 내용물을 감싸는 바게트는 다른 첨가제 없이 밀가루에 소금, 물, 이스트만 넣어 반죽한다. 이 반죽을 무려 4~5시간에 걸쳐 3차례 발효시킨 뒤 오븐에서 구워낸다.
바게트 안에 넣는 속 재료는 고수, 붉은 청양고추, 적양파, 파, 오이, 무와 당근 피클이다. 여기에 마요네즈, 닭의 간으로 만든 파테, 피시 소스 등 세 가지 소스가 들어간다. 이 내용물들은 오리지널 반미 샌드위치의 맛과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선별했다.
종류는 주재료에 따라 세 가지. 오븐에 구운 돼지 삼겹살이 들어간 포크 바게트, 닭고기를 고추장 베이스 소스로 간을 맞춘 치킨 바게트, 다진 돼지고기를 빵가루와 계란으로 버무린 미트볼 바게트다. 가격은 세 가지 모두 5500원. 주문 후 내용물 삽입 시, 고수를 비롯해 자신이 기피하는 채소가 있을 경우 빼달라고 하면 된다.
바삭한 바게트를 갈라 주재료와 채소를 넣은 반미 샌드위치는 짭짤한 듯 매콤하면서 채소들이 아삭하게 씹힌다. 치킨 바게트는 고소한 닭고기 맛이 일품이고, 포크 바게트는 기름기가 없어 담백하다. 세 종류 모두 원재료의 맛을 살려 질리지 않아 중독성이 높다. 바게트(번) 맛이 좋아 사겠다는 손님이 많아 아예 1500원씩에 별도로 판다.
보통 음료와 함께 먹는데 손님들이 베트남 커피(핫, 아이스 3800원)와 아메리카노(3800원)를 많이 찾는다. 베트남 커피는 베트남산 원두와 베트남산 연유로 만들어 베트남 커피의 풍미를 그대로 살렸다. 쌉쌀하고 단 맛이 진하다.
반미 샌드위치가 생각보다 크다. 하나만 먹어도 배부르다. 주식으로 먹기도 하지만 간식으로도 든든하다. 그래서 그런지 식사 시간대가 아닌 시간에도 손님이 자주 들어온다. 주변에 기획사나 게스트 하우스가 포진해 연예인이나 외국인 단골도 꽤 된다고 한다.
본토보다 수준 높은 호주식으로 만들어내
어떤 손님은 쌀가루로 만든 반미 샌드위치를 찾지만 쌀가루는 넣지 않았다. 반미 샌드위치의 정체성이 쌀가루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김씨도 처음에는 반미 샌드위치 특유의 식감이 쌀가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트남에 가서 확인해보니 쌀가루가 아닌 온도나 습도 등 환경적 요인과 그들만의 독특한 제빵 기술 때문이었다고 한다. 즉 베트남의 자연 환경과, 이 기후 환경을 본능적으로 발효에 적절하게 활용하는 베트남 사람의 협업에 따른 결과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요즘에는 베트남에서도 쌀가루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노이 바게트>는 엄밀히 말하면 베트남식이 아닌, 호주식이다. 베트남의 반미 샌드위치가 호주나 미국으로 건너가 맛과 내용물이 좀 더 고급스러워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집의 반미 샌드위치는 원조 반미 샌드위치를 좀 더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다. 당초 김씨가 먹어봤던 반미 샌드위치도 이미 베트남을 떠나 호주에서 발전한 형태의 음식이었다.
반미 샌드위치의 가치를 눈여겨본 일부 베트남 인들이 외국에서 발 빠르게 수준을 높여놨지만 베트남 내부에선 아직도 대부분 길거리 음식에 머물고 있다고. 그래서 호주나 미국에서 먹어본 이들에겐 이 집 샌드위치가 익숙하지만 베트남에서 먹어봤던 손님에겐 다소 생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집은 하루에 적게는 80개, 많게는 120~130개 정도 한정된 수량만 판매한다. 그래서 문 여는 시각은 오전 11시지만 문 닫는 시각은 들쭉날쭉하다. 대개 오후 7시 30분쯤이면 다 팔린다고 한다.
반미! 한국식 발음이긴 하지만 미국과 치열하게 싸웠던 베트남 음식 이름으로서는 참 얄궂다. 베트남도 우리나라만큼이나 외세에 시달려온 나라다. 얼마 전까지 프랑스, 미국, 중국과 전쟁을 치른 그들이다. 외세의 눈치 보기로 일관했던 우리 근 현대사에 비춰보면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가 강한 그들이 한없이 부럽다. 전쟁터의 베트남 전사 배낭 속에도 반미 샌드위치는 들어 있었을 것이다. 전투가 끝나면 반미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랬을 터이다. 그들이 지켜낸 땅에서 그들의 빵을 먹는 베트남인은 얼마나 떳떳한가? 역사 앞에서 나는 오늘 부끄럽지 않은 빵을 먹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하노이 바게트>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월드컵로 14길 60, 02-6401-9055
기고= 글 이정훈, 사진 이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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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월드컵로 14길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