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업가들 &

탈출 게임으로 도쿄를 흔든 사나이 (Scrap)

Tony the 명품 2019. 3. 19. 17:07

by조선비즈

20·30대 사이에선 오프라인 방 탈출 게임 카페가 인기다. 스스로 방에 갇히고 스스로 나오려고 갖은 애를 쓴다. 때로는 어두컴컴한 벽을 더듬어 힌트를 찾고 때로는 골치아픈 수수께끼를 푼다. 참가비는 대략 1만~2만원. 왜 돈 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걸까.


가토 다카오(加藤隆生·44) 스크랩(SCRAP) 창업자 겸 대표는 지난 4일 조선비즈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스토리에 몰입한다. 몰두하다 보면, 문득 문제를 해결하는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영감은 일종의 쾌감을 주는 데, 이걸 잊지 못해 다시 방에 갇힌다는 설명이었다.


가토 대표는 대학에서 심리학 전공 후 인쇄회사에 취직했지만 바로 퇴사하고 2004년부터 교토에서 인디밴드 활동을 했다. 스크랩은 당시 그가 인디밴드 음악활동 홍보를 위해 만든 무료 신문의 이름이다.


신문은 이것저것 이벤트를 만들어 공연을 보러 올 사람을 모았다. 2007년 만든 ‘리얼탈출게임’도 그 중 하나였는데, 입장권이 순식간에 동이 나고 150명이 게임을 하려고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가토 대표는 이듬해 아예 방 탈출 게임을 전문으로 기획∙운영하는 회사를 세웠다. 가토 대표에게 ‘방 탈출 게임의 창시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스크랩은 2017년 도쿄 번화가 신주쿠 가부키초에 ‘도쿄 미스테리 서커스’라는 수수께기 전용 테마 빌딩을 만들고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지역에도 진출했다.


가토 대표는 줄무늬 남방, 품이 넉넉한 니트 자켓에 무선 이어폰을 걸치고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중절모를 쓴 탓에 키는 180cm이 족히 돼 보였다. 말투는 담담했고 표정에 아주 가끔씩 장난스러움이 스쳤다.

탈출 게임으로 도쿄를 흔든 사나이

가토 다카오 스크랩 창업자 겸 대표가 3월4일 광화문 스튜디오 ‘조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주연 PD

뮤지션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인쇄회사의 영업직으로 1년 6개월 일하다 그만뒀다.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나를 위로해준 게 음악이라, 교토에서 인디 밴드를 결성해 보컬과 기타를 맡았다. 내 또래의 교토 출신 인디 밴드가 잘 되는 걸 보면, ‘저 자식, 도쿄 가더니 변했어’라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지금도 기타를 메고 회사에 갈 때가 있다. 직원들이 난처해하기도 하지만."


스크랩을 만든 계기는.


"2000년대 초반, 교토에서 인디밴드 음악 활동을 할 때, 밴드 홍보를 위해 만든 무료 신문 ‘스크랩’이 시작이다. 재미있는 기획을 찾다가 당시 온라인에 유행하던 탈출게임을 오프라인에 그대로 옮겨보자는 생각에 2007년 ‘리얼탈출게임’이라는 이벤트를 열었는 데, 반응이 좋았다. 그게 계기가 돼 2008년 회사를 설립하고 2010년엔 도쿄에도 진출했다."


스크랩은 적에게 흔적을 들키지 않고 탈출하는 잠입게임, 거리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게임 등을 만든다. 야구장, 학교 뿐만 아니라 지하철과 도심고층빌딩 등 대규모 시설에서 즐길 수 있는 탈출 게임도 만든다. 이 회사가 만든 탈출 게임의 누적 이용자수는 2018년 380만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발표한 매출액은 24억5800만엔으로 5년전보다 6배 늘어났다. 직원수는 110여명이다.


젊은이들은 왜 방 탈출 게임에 열광하나.


"한 가지 이유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우선 ‘디지털 네이티브(인터넷과 모바일을 태어날 때부터 자유자재로 쓰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오프라인 경험은 그 자체로 새롭다.


또 이들은 TV, 책, 영화 등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방향 엔터테인먼트’에 만족하지 않는다. 내가 주인공이 돼 스토리를 직접 만들어 공유하기를 원한다. 방 탈출 게임은 참가자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엔터테인먼트다. 방 탈출 게임을 하다보면, 스토리에 몰입하는 순간이 온다. 이때 각종 문제를 푸는 영감이 나온다. 영감에는 쾌감이 있다. 이걸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리얼탈출게임만의 특징은.


"동료 의식의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초중고를 다니면서 ‘올바른 것을 위해 협력하라’고 배운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돈과 성과에 매달려 순수한 동료 의식을 발휘해 볼 기회가 많지 않다. 리얼탈출게임은 서로 협력해 문제를 풀도록 하는데, 이때 동료 의식을 맛보게 된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구하던 거였다."

탈출 게임으로 도쿄를 흔든 사나이
탈출 게임으로 도쿄를 흔든 사나이

리얼탈출게임을 즐기는 모습 /스크랩

2014년 시작된 도쿄메트로(지하철)와의 대규모 협업 게임이 흥미롭다. 누가 제안했나.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당시 직원수도 적었다. 프로젝트를 제안할 여력이 있던 건 아니었다. 도쿄메트로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도쿄메트로 직원 중에 리얼탈출 게임 단골손님도 있었다. 도쿄메트로와 협업해 만든 ‘도쿄메트로 언더그라운드 미스터리’ 게임은 이제 연간 10만명이 참가하는 큰 규모의 게임이 됐다. 누적 이용자수는 25만명이다."


‘도쿄메트로 언더그라운드 미스터리’게임은 도쿄메트로의 지하철 전 노선 자유이용권을 구매해 도쿄 곳곳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풀어가면서 모험하는 체험형 게임이다. 매해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다.


부모 입장에서는 무명 밴드 소속 가수보다 잘 나가는 기업인의 모습을 더 좋아하겠다.


"글쎄. 난 돈을 벌기 위해 뭔가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회사라는 건 수익을 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만든 작품들이 세상에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음악이든, 게임이든, 뭐든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걸 다 하고 죽고 싶다."


스크랩 홈페이지를 보니, ‘이야기 세상에서만 본 것을 일상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기업 이념’이라고 설명했더라.


"초등학교 2학년 때 만화 ‘도라에몽’을 읽었다. 만화 주인공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로봇 친구 도라에몽을 만났다. 나도 한 살만 더 먹으면, 도라에몽을 만나 신비로운 일을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고 그 충격과 아쉬움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라에몽의 충격이 스크랩을 만든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하늘에서 누군가 내려온다거나, 내가 책속으로 들어간다거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등 불가능한 일들을 실현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리얼탈출게임의 토대가 됐다.


스크랩의 기념 이념은 간단하다. 우리는 강한 비전과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기업이 아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있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일을 찾고, 지속적으로 이를 실현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면 가장 재미있는 곳에 가 있지 않을까."


어떤 게임이 흥행하나.


"‘재미있는 것보다 재미있을 것 같은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가령 ‘여기에 오면 흥미로운 수수께끼가 가득하니 와주세요’라고 호소하는 것보다 ‘다이아몬드를 숨긴 장소가 있으니 와서 네가 와서 한번 찾아봐라’ 하는 쪽이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실 공간에 이야기 세계를 구현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상상의 나래를 글로 쓰는 게 더 쉽지 않나.


"내가 리얼탈출게임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만화 쪽에 재능이 있었다면, 그걸 했을 것이다. 시장이 크니까. 특정 공간을 흥미진진한 게임 공간으로 만든 건 어렵지 않다. 내게 지금 시간을 조금 준다면 지금 이 방도 흥미로운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


가령, ‘전등을 끄면 힌트를 보여주면 어떨까’ ‘그렇다면 전등을 끄는 도구를 숨겨두자’ 식으로 아이디어를 굴려가는 것이다. 이 방에서만 아이디어 100가지가 나온다. 그중 제일 재미있는 3가지를 선택하면 된다."


2017년 도쿄 한복판에 ‘도쿄 미스테리 서커스(TMC)’라는 리얼탈출게임 전용 센터를 만들었다.


"5층 빌딩 규모에서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 큰 투자였고 어려운 결정이었다. TMC의 게임을 직접 풀어보고 난이도를 조절했다. 게임을 300회 이상 풀었을 것이다. 내가 만든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를 보면서 ‘아, 이 게임 만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스크랩은 닛산과 유니클로 등 다양한 기업과 협업하고 교육 콘퍼런스에도 초청을 받았다. 확장성이 엿보인다.


"리얼탈출게임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고 피부로 느끼는 오감으로 체험하는 엔터테인먼트다. 기업들은 오감을 활용해 고객의 일상생활에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알릴 수 있다.


인터뷰 직전, 한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청소년들이 리얼탈출게임을 통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해본다면, 자살률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롭게 준비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지금은 1시간 게임에 주력하고 있지만 호텔에서 하룻밤 머물며 심야 모험에 도전하는 게임도 계획중이다. 내년에는 도쿄올림픽이 개최된다. 마라톤 10km를 뛰지 못하면 수수께끼를 풀 수 없는 장치를 이용자 몸에 걸어둬 수수께끼 풀이와 운동을 연동하는 방식도 고안 중이다."


함께 일하고 싶은 인재상은.


"우리는 원하는 걸 밀어붙이거나 강요하는 회사가 아니다.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면서 흥미로운 게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면 환영이다. 지금 당신이 1장짜리 A4에 아이디어를 써서 보여달라. 재미있으면 바로 채용하겠다."


1974년생인 가토 다카오 대표는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일본 저성장 시기에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인터뷰 내내 저성장을 마주한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들이 떠오른 이유다. 방 탈출 게임을 소재로 흥행에 성공한 ‘이스케이프 룸(감독 애덤 로비텔)’이 14일 개봉한다. 전자상거래에서 밀린 기존의 유통 기업들은 ‘경험 경제'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이래저래 방 탈출’이 시대 코드로 부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토 다카오 스크랩 창업자 겸 대표가 3월4일 광화문 스튜디오 ‘조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주연 PD

류현정 기자(dreamshot@chosunbiz.com